S.P.E.C.T.R.E는 Special Executive for Counter-intelligence, Terrorism, Revenge and Extortion이라 불리는 범죄조직이다. S.P.E.C.T.R.E(이하 스펙터)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탄생시킨 영국 작가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1961년 소설 ‘썬더볼(Thunderball)’에 처음 등장하여 1963년작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 1964년작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 등 모두 세 편의 소설 시리즈에 등장했다.

스펙터가 등장하는 세 편의 제임스 본드 소설은 ‘블로펠드 트릴로지’라 불리기도 한다. ‘블로펠드 트릴로지’의 ‘블로펠드’는 범죄조직 스펙터의 우두머리, 언스트 스타브로 블로펠드(Ernst Stavro Blofeld)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범죄조직 스펙터는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 시리즈 뿐만 아니라 007 영화 시리즈에도 여러 차례 등장했다. 소설 시리즈엔 세 번 등장한 게 전부지만 영화 시리즈에선 1탄 ‘닥터 노(Dr. No)’부터 시작해서 2탄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 4탄 ‘썬더볼(Thunderball)’, 5탄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 6탄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 7탄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 등 여섯 편의 영화에 등장했다. 1탄에서 7탄 중에 3탄 ‘골드핑거(Goldfinger)’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편에 스펙터가 등장했던 것이다.

1983년 아일랜드 출신 영화 프로듀서 케빈 맥클로리(Kevin McClory)에 의해 제작된 언오피셜 제임스 본드 영화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Never Say Never Again)’까지 합하면 모두 일곱 편으로 늘어난다.

그렇다면 스펙터라는 범죄조직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스펙터는 1950년대 말 소설가 이언 플레밍과 아일랜드 출신 영화 프로듀서 케빈 맥클로리가 제임스 본드 영화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플레밍은 그의 제임스 본드 소설 시리즈를 TV나 영화로 옮기고자 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플레밍의 옛 친구인 아이바 브라이스(Ivar Bryce)가 그와 동업 관계에 있었던 젊은 아일랜드 출신 영화 프로듀서 케빈 맥클로리를 플레밍에게 소개하면서 흐지부지되어가던 제임스 본드 영화 프로젝트에 재시동이 걸렸다. 그러나 맥클로리는 플레밍의 소설을 그대로 영화로 각색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제작을 위한 오리지날 스토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한마디로 말해,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새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플레밍은 소설가였을 뿐 영화 제작 쪽은 전혀 알지 못했으며, 그가 원했던 것은 제임스 본드 소설을 영화로 옮기는 것이었지 영화 제작을 위한 스토리를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 영화화를 열망했던 플레밍은 맥클로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스토리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플레밍과 맥클로리는 이후에 고용한 영국인 스크린라이터 잭 위팅햄(Jack Whittingham) 등과 함께 영화 스크립트를 완성시켰으며, 완성된 스크립트는 1960년 출판된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의 토대가 되었다. 이 소설은 이후에 1965년 숀 코네리(Sean Connery)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이렇게 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으며, 법정싸움까지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플레밍, 맥클로리, 위팅햄 등 당사자 모두에게 불행한 엔딩을 선물한 ‘썬더볼’이 만들어진 것이다.

바로 이 ‘썬더볼’과 함께 탄생한 것이 범죄조직 스펙터다.

제임스 본드 영화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제작진은  ’영화에선 냉전체제에서 벗어나 정치색을 띄지 않은 범죄조직을 새로운 적으로 세우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에선 항상 소련이 적으로 등장했지만 영화가 완성되어 개봉할 즈음이 되면 냉전이 종식되었을 수도 있으므로 영화에선 소련이 아닌 새로운 적을 준비하는 게 현명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플레밍은 전 SMERSH, 전 게슈타포, 전 마피아 멤버 등이 한데 모인 스펙터라는 새로운 거대  범죄조직을 탄생시켰다.

플레밍은 제임스 본드 소설에서 ‘스펙터’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해왔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에선 스펙터빌(Spectreville)이라는 장소가 등장했고, ‘프롬 러시아 위드 러브’에선 소련의 암호해독기 이름이 스펙터(Spektor)였다. 플레밍은 이번엔 국제 범죄조직에 스펙터(S.P.E.C.T.R.E)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플레밍의 범죄조직 스펙터 아이디어는 제작 파트너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고, 결국 이탈리안 범죄조직 마피아로 교체되었다. 소설과 영화 ‘썬더볼’에 등장하는 악당들이 이탈리안 이름을 가졌고, 영화에서 악역을 맡았던 영화배우들이 이탈리안이었던 점 모두 당시 제작진이 이탈리안 마피아를 제임스 본드의 적으로 삼으려 했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안 마피아 아이디어도 빛을 보지 못했다. 플레밍이 1960년 발표한 소설 ‘썬더볼’에서 이탈리안 마피아를 빼고 범죄조직 스펙터를 다시 넣었기 때문이다. 플레밍은 소설 ‘썬더볼’에서 마피아를 스펙터로 바꾼 대신 고위급 스펙터 멤버 20명 중 3명을 마피아 출신으로 설정했다.

이렇게 해서 스펙터가 이탈리안 마피아를 누르고 제임스 본드의 새로운 적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공의 범죄조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범죄조직 스펙터의 우두머리 언스트 스타브로 블로펠드 역시 플레밍이 소설 ‘썬더볼’을 쓰면서 만든 캐릭터다.

그러나 플레밍이 영화 스크립트를 함께 만든 케빈 맥클로리와 잭 위팅햄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문제의 영화 스크립트를 기반으로 한 소설 ‘썬더볼’을 출판하면서 법정싸움에 휘말렸고, 이에 패소하면서 ‘썬더볼’의 영화판권과 등장 캐릭터 라이센스를 맥클로리에 내주게 됐다. 소설에선 ‘썬더볼’에 등장한 스펙터와 블로펠드 등을 계속 사용할 수 있지만 영화에선 맥클로리의 동의 없인 사용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바로 이 문제로 인해 007 영화 시리즈 프로듀서가 된 알버트 R. 브로콜리(Albert R. Broccoli)의 EON 프로덕션과 케빈 맥클로리는 오랫동안 치열한 법정싸움을 벌이게 됐다.

1971년 영화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를 마지막으로 스펙터가 007 시리즈에서 사라진 이유 역시 EON 프로덕션과 케빈 맥클로리 간의 트러블 때문이다. 1965년 케빈 맥클로리가 EON 프로뎍션과 공동으로 ‘썬더볼’을 제작하면서 EON 프로덕션이 앞으로 10년간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영화 시리즈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계약을 맺었으나, 70년대 중반이 되어 10년 계약기간이 끝나자 맥클로리 측이 EON 프로덕션이 더이상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영화에 사용할 수 없도록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EON 프로덕션은 1977년작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에 스펙터를 다시 등장시킬 계획이었으나 맥클로리 측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새로운 악당과 범죄조직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맥클로리는 그가 영화 판권을 소유한 ‘썬더볼’을 기초로 한 제임스 본드 영화를 제작하고자 했고, 1980년대 초 결실을 맺었다. 바로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이다.  ’썬더볼’ 리메이크인 언오피셜 제임스 본드 영화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엔 EON 프로덕션이 제작하는 오피셜 007 시리즈에 더이상 나올 수 없게 된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제임스 본드의 적으로 등장했다.

이렇게 해서 EON 프로덕션이 제작하는 오피셜 007 시리즈에 스펙터가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1971년작 ‘다이아몬드는 영원히’가 됐으며, 오피셜 007 시리즈에 포함되지 않는 언오피셜 제임스 본드 영화까지 범위를 넓히면 케빈 맥클로리의 1983년작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이 된다.

그렇다면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 시리즈에서 스펙터는 어떠한 음모를 꾸몄을까?

①스펙터가 처음으로 등장한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은 ‘썬더볼’이다. ‘썬더볼’에서 스펙터는 핵무기 2기가 탑재된 나토(NATO)의 폭격기를 하이재크한 뒤 거액을 요구한다. ‘플랜 오메가’로 명명된 스펙터의 폭격기 납치작전은 20명의 스펙터 고위급 멤버 중 넘버1이자 우두머리 블로펠드 다음으로 스펙터의 2인자인 에밀리오 라고(Emilio Largo)가 직접 지휘를 한다.

②스펙터가 두 번째로 등장한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 ‘여왕폐하의 007′에선 스펙터 vs 007의 대결구도였던 ‘썬더볼’과 달리 스펙터의 우두머리, 블로펠드와 제임스 본드의 대결구도로 바뀌었다. 스위스에 새로운 기지를 마련한 블로펠드와 그의 여자 부하 어마 번트(Irma Bunt)는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온 여성 앨러지 환자들을 세뇌시켜 영국과 아일랜드에 생물학 무기 테러를 계획하지만 제임스 본드에 의해 실패한 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본드의 갓 결혼한 아내, 테레사(Teresa di Vicenzo aka 트레이시)를 사살한다.

③스펙터가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한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 ‘두 번 산다’에선 테레사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있던 본드가 일본에서 임무 수행 중 우연히 블로펠드와 어마 번트가 일본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테레사의 복수에 올인한다.

마지막으로, 스펙터가 007 영화 시리즈에서 꾸민 음모를 살펴보자.

①스펙터가 007 영화 시리즈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62년에 개봉한 007 시리즈 1탄 ‘닥터 노(Dr. No)’다. 플레밍이 1958년 발표한 동명 소설은 스펙터와 무관한 내용이지만 영화 버전 ‘닥터 노’에선 악당 줄리어스 노(Julius No)가 스펙터의 멤버로 바뀌었다. 줄리어스 노(aka 닥터 노)는 자메이카의 크랩 키(Crab Key)에 위치한 그의 기지에서 미국의 우주선 발사를 교란시키려 한다.

②스펙터가 두 번째로 등장한 영화는 1963년 개봉한 007 시리즈 2탄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이다. ‘위기일발’에선 제임스 본드에 의해 닥터 노를 잃은 스펙터가 소련의 암호해독기를 미끼로 본드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 지난 ‘닥터 노’와 마찬가지로 플레밍이 1957년 발표한 ‘위기일발/프롬 러시아 위드 러브’ 원작소설은 영국과 소련의 첩보전을 그린 스펙터와 무관한 내용이지만, 007 제작진은 이번에도 영국과 소련 중간에 스펙터를 집어넣었다.

③스펙터가 세 번째로 등장한 영화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007 시리즈 4탄 ‘썬더볼’이다. 영화 버전에서도 스펙터는 핵무기 2기가 탑재된 나토 폭격기를 하이재크한 뒤 거액을 요구한다.

④스펙터가 네 번째로 등장한 영화는 1967년 개봉한 007 시리즈 5탄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 ‘두 번 산다’는 로케이션이 일본이란 점, 몇몇 등장 캐릭터 정도를 제외하곤 원작소설과 거의 무관한 줄거리의 영화다. 영화 버전에선 일본의 화산에 비밀기지를 건설한 블로펠드와 스펙터가 미국과 소련의 우주선을 납치하며 양국을 이간시켜 제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려 한다.

⑤스펙터가 다섯 번째로 등장한 영화는 1969년 개봉한 007 시리즈 6탄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 이 영화는 전편 ‘두 번 산다’와 달리 플레밍의 원작소설에 충실하게 영화로 옮겨졌다. 영화에서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스위스에 기지를 차린 블로펠드와 스펙터가 여성 앨러지 환자들을 세뇌시켜 생물학 무기 테러를 계획한다.

⑥스펙터가 여섯 번째이자 오피셜 007 시리즈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영화는 1971년 개봉한 007 시리즈 7탄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 플레밍이 1956년 발표한 동명 소설은 스펙터와 무관한 내용이지만, 영화 버전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에선 블로펠드와 스펙터가 인공위성에서 발사한 레이저로 전세계의 핵무기를 파괴하면서 거액을 요구한다.

블로펠드와 스펙터는 ‘다이아몬드는 영원히’가 개봉한지 12년이 지난 1983년 케빈 맥클로리가 제작한 언오피셜 제임스 본드 영화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Never Say Never Again)’으로 돌아왔다.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은 ‘썬더볼’의 리메이크이므로 제목을 제외한 나머지는 오리지날 ‘썬더볼’과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