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시리즈 1탄 ‘닥터 노 (Dr. No)’는 영국 소설가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옮긴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다.

건강이 악화되던 이언 플레밍으로부터 제임스 본드 영화 판권을 산 캐나다 영화 프로듀서 해리 살츠맨 (Harry Saltzman)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관심을 보이던 미국 영화 프로듀서 알버트 R. 브로콜리 (Albert R. Broccoli)와  함께 영화 프로덕션 EON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플레밍의 소설 속 제임스 본드를 실버 스크린으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들이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로 계획했던 타이틀은 플레밍이 50년대 말부터 아일랜드 영화 프로듀서 케빈 맥클로리(Kevin McClory) 등과 함께 영화 제작을 위해 준비해왔던 ‘썬더볼(Thunderball)’이었다. 그러나 플레밍이 맥클로리와의 관계를 청산한 뒤 그와 함께 준비했던 ‘썬더볼’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삼은 소설을 발표한 것이 화근이 되어 양측 간에 법정시비가 붙자 브로콜리와 살츠맨은 ‘썬더볼’을 포기하고 플레밍이 1958년에 발표한 여섯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 ‘닥터 노’를 영화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플레밍의 소설 ‘닥터 노’ 역시 미국 NBC 방송사의 어드벤쳐 TV 시리즈 제작을 위해 준비했던 스토리를 계획이 취소되면서 소설로 옮긴 것이다.

이렇게 해서 플레밍의 여섯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 ‘닥터 노’가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로 만들어졌다.

소설 ‘닥터 노’의 줄거리는 소련의 도움을 받아 자메이카의 섬에 있는 비밀 기지에서 미국의 유도 미사일을 교란시키는 음모를 진행 중인 중국인 닥터 노의 미스테리를 제임스 본드가 풀어간다는 내용이다.

영화 버전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닥터 노의 교란 대상이 유도 미사일에서 미국 우주선으로 바뀌었고, 닥터 노의 파트너가 소련이 아닌 스펙터라는 범죄조직으로 바뀐 것이 큰 차이일 뿐 전체적인 줄거리는 원작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원작에 나오지 않는 캐릭터들이 나오는 등 플레밍의 원작소설과 차이점도 적지 않은 편이지만, 메인 플롯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스펙터라는 범죄조직의 등장이다. 원작소설에선 소련이 닥터 노의 파트너였으나 영화에선 소련이 아닌 스펙터라는 범죄조직으로 바뀌었다.

스펙터(SPECTRE)란 ‘Special Executive for Counter-Intelligence, Terrorism, Revenge and Extortion’이라 불리는 범죄조직이다. 스펙터는 50년대 말 이언 플레밍이 케빈 맥클로리 등과 함께 영화 제작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범죄조직이다. 플레밍이 쓴 대부분의 제임스 본드 소설에선 SMERSH, KGB 등 소련 정보부나 그들의 파트너들을 주로 적으로 삼아왔으나 영화에서는 적을 소련과 공산권 국가들로 삼지 말고 정치성을 띄지 않은 국제 범죄조직으로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영화에선 소설과 달리 냉전과 거리를 두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견이 받아들여지면서 소련을 대체할 적으로 마련된 범죄조직이 바로 스펙터다.

알버트 R. 브로콜리와 해리 살츠맨도 ‘닥터 노’를 영화로 옮기면서 스펙터를 적으로 삼는 쪽을 택했다. 스크린라이터 리처드 메이밤(Richard Maibaum)이 만든 ‘닥터 노’ 스크립트 초안에선 영화의 악당이 닥터 노가 아닌 원숭이였던 것만 보더라도 이들이 냉전을 배경으로 한 진지한 스파이 영화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리처드 메이밤의 ‘원숭이 악당’ 아이디어는 프로듀서들의 반대로 다시 ‘인간 닥터 노’로 바뀌었으나, 닥터 노의 파트너였던 소련을 빼고 원작에 나오지 않은 스펙터라는 국제 범죄조직으로 대신하면서 냉전과 거리를 두는 것은 잊지 않았다.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주인공,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배우는 스코틀랜드 태생의 무명 배우 숀 코네리(Sean Connery)다. 프로듀서 브로콜리가 핸썸하고 터프하면서도 섹시한 젊은 코네리를 보고 제임스 본드로 정한 것이다.

007 프로듀서들이 숀 코네리를 제임스 본드로 소개하자 제임스 본드를 탄생시킨 소설가 이언 플레밍은 투박해 보이는 코네리의 모습에서 세련된 상류층 젠틀맨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플레밍이 창조한 캐릭터 제임스 본드는 담배부터 시작해서 음식, 술, 옷, 자동차 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을 브랜드를 따져가며 꼼꼼하게 챙기는 상류층 젠틀맨 타잎인데 스코틀랜드에서 우유배달을 하던 코네리에게선 제임스 본드와 닮은 점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닥터 노’ 연출을 맡게 된 영화감독 테렌스 영(Terence Young)도 코네리 캐스팅에 난색을 표했다. 세련된 상류층 젠틀맨 스파이 제임스 본드 역에 코네리가 잘 어울릴 것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스타일리쉬한 라이프스타일과 친숙한 영 감독이 직접 ‘숀 코네리 제임스 본드 만들기’ 작전에 나섰다. 하나부터 열까지 영 감독이 코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코네리의 변신은 대성공이었다. 코네리는 제임스 본드 역에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어울렸고, 부드러움과 무시무시할 정도의 터프함을 모두 갖춘 최고의 제임스 본드로 탄생했다. 코네리 캐스팅을 못마땅해 했던 플레밍도 ‘닥터 노’를 촬영한 자메이카에서 코네리를 처음 만난 뒤 그를 본드로 받아들였다.

본드걸 허니 라이더 역은 스위스 무명 여배우 우술라 안드레스(Ursula Andress)에게 돌아갔다. 미국 영화배우 겸 사진작가 남편 존 데릭(John Derek)이 찍은 섹시한 안드레스의 사진을 받아 본 007 제작진이 그녀를 허니 라이더로 캐스팅하기로 결정한 것. 우술라 안드레스는 자메이카의 해변에서 흰색 비키니 차림으로 바다에서 걸어나오는 씬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본드와 카지노에서 만나 연인 사이로 발전하는 실비아 트렌치 역은 유니스 게이슨(Eunice Gayson)이 맡았다. 실비아 트렌치는 플레밍의 원작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였으나, 007 제작진은 여러 편의 시리즈에 트렌치를 출연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트렌치 이외로 원작소설에 나오지 않는 또 하나의 본드걸이 영화에 나오는데, 그녀는 바로 미스 타로다. 닥터 노의 스파이, 미스 타로 역은 제나 마샬(Zena Marshall)이 맡았다.

악당 닥터 노 역은 캐나다 배우 조셉 와이즈맨(Joseph Wiseman)이 맡았으며, 자메이카에서 본드를 돕는 CIA 에이전트 필릭스 라이터 역은 미국 영화배우 잭 로드(Jack Lord)가 맡았다. 영국 정보부 국장 M 역은 영국 배우 버나드 리(Bernard Lee)가 맡았으며, M의 비서 미스 머니페니는 캐나다 여배우 로이스 맥스웰(Lois Maxwell)이 맡았다. 또, 본드의 핸드건을 베레타에서 월터 PPK로 교체하는 장비 담당 메이저 부스로이드(Q) 역은 피터 버튼(Peter Burton)이 맡았다.

영화 ‘닥터 노’엔 원작소설에 나오지 않은 악당도 하나 나오는데, 그는 바로 덴트 교수이다. 덴트 교수는 본드가 차가운 표정으로 사일렌서를 장착한 핸드건으로 사살하는 유명한 씬에 나왔던 캐릭터다. 덴트 교수 역은 ‘닥터 노’를 연출한 테렌스 영 감독의 영화에 여러 차례 출연했던 앤토니 더슨(Anthony Dawson)이 맡았다.

‘닥터 노’의 메인 타이틀 곡 ‘제임스 본드 테마(James Bond Theme)’는 영국 작곡가 몬티 노만(Monty Norman)이 기초 틀을 만든 것을 또다른 영국 작곡가 존 배리(John Barry)가 편곡했으며, 존 배리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았다. ‘제임스 본드 테마’를 제외한 나머지 사운드트랙 수록곡은 대부분 자메이칸 칼립소 풍의 곡들이며, 바이론 리 밴드 (Byron Lee and the Dragonaires)와 다이아나 커플랜드(Diana Coupland)가 보컬을 맡았다. 바이론 리 밴드는 ‘Kingston Calypso’, ‘Jump Up’을 비롯한 여러 수록곡들을 불렀고, ‘닥터 노’ 음악을 맡았던 작곡가 몬티 노만의 당시 아내였던 다이아나 커플랜드는 허니 라이더(우술라 안드레스)가 비키니 차림으로 바다에서 나와 ‘Under the Mango Tree’ 노래를 부르는 씬에서 노래 더빙을 맡았다.

프로덕션 디자니어 켄 애덤(Ken Adam)은 플레밍의 소설을 기초로 한 닥터 노의 기지를 훌륭하게 디자인했으며, 편집은 피터 헌트(Peter Hunt), 촬영은 테드 무어(Ted Moore), 007 시리즈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오프닝 건배럴씬과 메인 타이틀 디자인은 모리스 빈더(Maurice Binder)가 담당했다.

바로 이렇게 젠틀맨 수퍼 스파이, 제임스 본드를 주인공으로 한 007 시리즈의 역사가 시작했다.